세계의 공장에서 세계 IT 클러스터로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 IT 클러스터로

박래정 | 2004-09-17 |

- KOTRA 중국 투자시찰단 참관기(9월 5일∼11일) -

 

전통제조업에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중국이 하이테크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과의 기술격차가 수년 내 역전될 것이란 우려가 팽배해졌다. 베이징에 이어 중국 IT산업의 메카로 떠오른 연해 주요 지역을 둘러본다.

 

동관, 중국 IT 산업의 베이스캠프


“동관(東莞)을 오가는 교통이 막히면 바다 건너 실리콘 밸리의 컴퓨터 값이 뛴다”(IBM 임원).
중국 전문가라면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다. 동관은 중국 화남의 관문인 홍콩에서 100Km 북서쪽에 놓인 156만 인구의 중소 도시. 홍콩, 선전과 광동성 성도인 광저우의 중간에 놓인 행운 탓에 일찌감치 전자 전기 부품산업의 베이스캠프로 떠올랐다.


개혁개방 초기부터 홍콩 대만기업들이 몰려들기 시작해 현재 동관시엔 컴퓨터 등 IT 관련 기업만 3,000여 개가 포진해있다. 동관시 대외무역경제합작국이 KOTRA 한국투자 시찰단에 내놓은 점유율 자료를 보자. 컴퓨터 마그네틱 헤드가 40%, 디스크 드라이브 30%, 스캐너와 소형모터 20%, 키보드는 16%, 메인보드는 15%…. 찬찬히 뜯어보니 중국 내수시장이 아니라 세계 시장 점유율이다. ‘세계의 공장, 중국’이 빈말이 아니다.


10년 전 필자는 한국 기업들의 첫 중국 투자붐이 불었을 때 투자환경을 조사한다며 동관을 들른 적이 있다. 당시 붉은 흙먼지를 날렸던 비포장 도로는 깔끔한 아스팔트로 바뀌었고 곳곳에 고층건물이 들어찼다. 5성급 호텔만 9개다.


동관에는 이제까지 1만 4,800개의 외국기업이 투자했고 중국 로컬기업도 2만개가 입주했다. 이중 포천지가 꼽는 세계 500대 기업만 43개다. 외국 투자자금이 240억 달러(누계 기준)를 넘어섰다니 오늘날 동관을 일궈낸 일등공신은 외자인 셈이다.


동관의 발전은 타고난 입지에 3개 국제공항, 5개의 고속도로, 4개의 항구를 닦은 물류정책의 산물이었다. 리챠오건(黎橋根) 동관시 대외무역경제합작국 국장은 “개방 초기부터 전기전자 산업에 포커스를 맞춘 중앙정부의 방침이 옳았다”고 말했다. 대만의 중소 전기전자 산업과 홍콩 자본력에 포커스를 맞춘 특화정책 덕택에 IT산업의 융성이란 국제 흐름에 편승할 수 있었다는 평가다. 동관시의 지난해 제조업 생산액 중 전자통신 관련 비중은 33.7%, 수출총액 중 전자통신 비중은 무려 47.8%에 이른다.


그래도 외자유치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상하이 KOTRA 중국지역본부의 한 관계자는 “외자유치액의 일정 부분이 비공식적으로 담당 공무원들에게 인센티브로 주어지기 때문에 외국기업 유치에 혈안이 돼있다”고 말했다.  동관시 당국은 아예 매월 10일을 외국기업 서비스날로 정했다. 이 날엔 17개 외국기업 담당 부서가 모두 참가, 외국기업이 제기한 불만에 대해 해결방안을 내고 반드시 서면으로 알려준다.


한국의 IT 벤처 20여개사가 참가한 이번 KOTRA 시찰단은 당연히 각 개발구 당국의 집중 타깃이 됐다. 시 산하의 랴오부(寮步)진과 송산후(松山湖)과학기술산업원구 등은 최고 책임자가 모두 나서 한국 시찰단을 맞았다. 특히 랴오부진은 아예 70만㎡를 한국기업 전용공단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장미빛 청사진의 이면에는 그늘진 곳도 숨어있기 마련. 동관시 부시장을 예방하기 위해 시내 호텔을 찾아가는 도중 사단이 벌어졌다. 시 외곽 송산후 과기산업원구를 둘러본 시찰단은 오후 5시로 예정된 약속시간에 맞춰 서둘러 시내 진입로로 차를 돌렸다. 그러나 편도 3차로인 진입로는 대형 컨테이너 운송차량과 화물차 승용차들이 뒤엉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려 3번이나 불법 유턴, 길을 바꿔 약속장소에 도착한 시간이 6시. 한 시찰단원이 “동관의 교통체증이 풀리면 실리콘 밸리 컴퓨터 값이 폭락하겠구만”이라고 혀를 찼다.


전력문제도 만만찮았다. 시찰단이 찾은 곳은 동관에 진출한 217개 한국기업 중 하나인 X전자. 450만 달러를 투자해 오디오 및 비디오데크를 만드는 중소기업이다. B총경리는 “원래 오늘(월요일)은 공장가동을 중단해야 하는데 한국 시찰단이 온다고 해 가동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다. 일주일에 2일은 공장가동을 중단해야 하는데 예외를 인정 받았다는 것.


그러나 시찰단이 조립라인을 둘러보던 중 갑자기 단전사태가 벌어졌다. 1분 여 뒤 전기가 들어와 조립라인은 재가동됐지만 정밀부품 라인이라면 큰 손실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찰단원들은 “동관지역에 들어오는 외자기업이 줄을 잇고 있어 전력부족 현상은 단시일 내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부족하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현지 단순 인력의 한달 월급은 700위안(약 11만원)∼1000위안(약 16만원)에 불과하지만 금형설계나 각종 소프트웨어 개발인력 등 고급엔지니어들은 7000위안을 훌쩍 넘어선다는 것이 X사 설명. 이들 마저 고임을 쫓아 수시로 회사를 옮겨다니기 때문에 엔지니어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동관시 당국은 이 같은 외국기업의 불만에 따라 지난 연말 뒤늦게 송산후과기원구 내에 동관과학기술대학 분교를 세우는 등 인력 공급에 나섰지만 수요를 따라가기엔 벅차 보였다.


중국 제조업의 가격전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전세계 디플레 압력의 주범으로 지목된 곳이 중국이었다.


광저우 시내의 모조 시계 전문상가인 찬시루(站西路). 슬럼을 연상시키는 시장 내부에는 2평 남짓한 벌집 매장 1백여개가 빼곡하고 세계 유명 브랜드 시계가 ‘진짜처럼’ 눈을 유혹한다. 가격은 한화 1,500원부터. KOTRA 광저우 무역관의 K차장은 “모조시계에도 부품은 수십 개가 들어가게 마련”이라며 “중국 제조업의 막강한 원가경쟁력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혀를 내둘렀다.


시내 중심가 전자매장인 타이핑양(太平洋) 상가. 3층 MP3 플레이어 매장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청소년 고객들이 들어찼다. 컴퓨터, 디카매장도 흥정하는 고객 점원들로 시끌벅적하다. LG, 삼성 등 낯익은 브랜드도 눈에 띈다. 바야흐로 폭발하기 시작한 중국 디지털 시장의 일단면이다.


그러나 전세계 IT업체가 광동성에 몰려온 만큼 가격 인하압력도 대단하다. 상가 앞에는 256MB 용량의 MP3 플레이어를 499위안(한화 8만원)에 판다는 피켓맨이 등장했다. 행인에게 나눠주는 광고전단은 저마다 예상을 밑도는 ‘최저가격’을 내세웠다. 세계 범용제품 시장을 석권하는 중국 제조업의 경쟁력이 거기에 녹아있다.

 

턱밑까지 다가온 중국의 카피(Copy) 능력


선전과 함께 개방 초기 경제특구로 지정됐던 샤먼(厦門)섬은 대만자본 유치용이다. 사실 대만령 진먼다오(金門島)는 샤먼항에서 배로 불과 1시간 거리에 있어 대만보다 중국 본토에 훨씬 가깝다. 오죽 가까우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이징대의 린이푸(林毅夫)교수가 진먼다오에서 대만군 장교로 복무하다 헤엄쳐 중국에 귀순했을까.


샤먼 바로 앞 작은 섬 구랑위(鼓浪嶼)에는 중상주의 시절 대만에 몰려든 네덜란드 해군을 몰아낸 정청공(鄭成功)의 대형 석상이 서있다. 명나라 유신인 정청공은 나중엔 신흥세력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대만에 지방정권을 세웠던 인물. KOTRA 샤먼무역관 관계자는 “최근 대만내 독립 여론이 거세지면서 중국에서는 정의 격하 움직임이 벌어지고 대신 정을 무력으로 진압한 본토의 다른 지방세력을 치켜세우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과거사를 후대의 입맛에 따라 재단하는 것은 고구려사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역사적으로 대만과 밀접한 탓에 대만기업 2,000여 개가 샤먼에 진출해있다.그러나 이들이 대부분 노동집약적 산업이나 부동산 개발에 눈을 돌리자 최근엔 한국기업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샤먼 시당국이 집중 육성하려는 디스플레이, 자동차, 액정, 철강산업 모두 한국이 경쟁력을 갖춘 분야.


시찰단이 묵고있는 호텔을 찾아온 푸저우(福州)시 양젠용(梁建勇)부시장은 “지난해에만 정부 투자비준 절차를 800개나 없앴다”며 빨라진 행정 서비스를 강조했다. 한술 더 떠 외국의 IT인력일지라도 대학졸업장만 들고 오면 최대 1년 동안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내보였다. 고급인력난이 외자유치에 걸림돌이 된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시찰단은 한국의 중견 휴대폰 업체인 Y사를 찾았다. 이 회사는 중국 중앙으로부터 휴대폰 제조승인을 얻은 50여 개사 중 하나. 최근 3개월 새 매출액 신장률이 중국 전문잡지가 보도할 만큼 두드러졌지만 주력인 3,500위안대의 중저가 모델은 중국 현지 업체들과 치열한 시장경쟁 중이다.


“아직 슬라이드폰이나 100만 화소폰 같은 분야는 중국업체들이 넘보기 어렵지만 카피능력이 워낙 뛰어나 경쟁이 치열하다”


이 회사 인사담당 B씨는 중국업체들과의 기술격차를 ‘6개월이면 쫓아온다’고 표현했다. 제품개발 경쟁은 핵심인력 스카우트전으로도 번진다. Y사도 상하이에 R&D 센터를 뒀다. 그러나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핵심 인력이 거액을 받고 중국업체로 옮겨가자 아예 샤먼으로 센터를 옮겨 문단속에 나섰다.
“전력은 문제 없습니까”(시찰단)


“비가 오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Y사 B씨)


수력발전이란 말인가. 대부분의 전력을 화력발전에 의존하는데, 물이 불어나 수로가 트여야 발전소에 연료를 공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해 3, 4개월은 단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주 2일 정도씩 공장가동을 중단해야 한다.


시찰단이 샤먼을 찾은 것은 매년 이곳에서 열리는 국제투자무역상담회 때문이다. 중국 상무부가 주관하는 국가적 행사인데 올해엔 우이(吳儀)부총리가 축사를 맡았다. 참가국만도 30여개국.


그러나 잠실 운동장 만한 행사장을 거닐면서 느낀 것은 중국 연해지역과 서부 내륙 지역의 극심한 경제력 차이였다. 연해지역 성 시들이 저마다 첨단, 중후장대형 산업을 과시하는 반면 칭하이, 신장, 윈난, 간수성 등 내륙의 빈한한 성의 안내 데스크 앞엔 가공 농산물이 거의 전부다.


상담회는 진먼다오가 보이는 해안가의 대형 컨벤션 센터에서 열렸다. 행사장을 나서니 해안가의 걸인들이 명함 같은 것을 건넨다. ‘1시간에 50위안’. 퇴폐 마사지의 호객꾼들이다.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샤먼. 샤먼도 중국병으로 떠오른 엄청난 소득격차 문제를 피해가지 못했다.

 

첨단 물류통관 기지, 수조우


예로부터 중국 미인들이 많이 났다는 수조우(蘇州). 그 설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상하이를 중핵으로 하는 화동지방의 신흥 물류 통관 기지로 거듭나고 있다는 느낌은 분명했다.


수조우 내 대표적인 수출가공공단인 공업원구. 중국과 싱가포르가 합작해 개발한 이 곳의 새로운 캐치 프레이즈는 ‘一次申報, 一次査驗, 一次放行’. 문자 그대로 한번에 신고, 한번에 검사, 한번에 패스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화물의 통관절차가 획기적으로 개선됐다는 자화자찬이기도 하다.


중국 국무원은 첫 외자도입 개발구인 이곳에 세관기능을 부여했다. 따라서 상하이 공항에 도착한 물품의 통관절차를 80Km 떨어진 공업원구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됐다. 항공 수입화물의 경우 5시간이면 통관이 끝난다고 한다. 통관개혁 시범구로 진행된 탓에 드물게 24시간 세관을 가동하고 있다. 공업원구 관계자는 “서류 한 장 필요 없는 전자통관시스템(EDI)”이라고 자랑했다. 적어도 중국 내에선 최고의 물류경쟁력이다.


당연히 외국자본의 진출도 두드러진다. 올 1월까지 유치한 외국기업 투자액은 156억달러. 건수로도 1,366건이나 된다. 한국기업은 이중 50여건, 투자금액 비중에서는 13%를 차지했다.


중관춘이냐, 푸동이냐


시찰단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인 상하이 푸동지구의 창장(長江)하이테크개발구. 중앙정부가 1992년 국가급 개발구로 지정했다. 1단계 개발지구의 면적만도 25㎢. 개발구 직원이 안내하는 지역엔 IT, 바이오, 집적회로 등 온통 R&D 관련 사업장 뿐이다. KOTRA 중국지역본부 어성일(魚性日)부본부장은 “이곳에선 선진국에서 투입하는 R&D 비용의 10분의 1로 프로젝트를 끝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세버스가 개발구를 유람하는 동안 GE,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교세라 등 세계적 기업들과 롄샹(聯想), 중신(中興)이동통신 등 중국을 대표하는 IT업체의 연구동이 지나쳐갔다.  중신이통 건물엔 연구인력이 3000명, GE 기술센터엔 700명이 근무한다는 설명이 들려왔다. 올 4월 기준 3,168개업체가 입주, 투자유치액만 108억 달러(계약기준). 포천 500대 기업 대부분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세계적 기업들이 몰려든 만큼 IT 산업에서 한국과의 격차가 가장 좁은 곳이다. 그 격차를 상하이 시 당국은 더욱 빠른 행정서비스와 R&D 집적효과로 메우려 하고있다. 외자유치 태스크포스(TF)팀장이 상하이 시장이다. 개발구 사무실 1층엔 세금문제 등을 단번에 처리할 수 있도록 원스톱 서비스 창구가 세워졌다. 한국 시찰단을 맞은 선웨이친(孫維琴)씨는 “토지계약이나 투자의향서를 맺은 뒤 실제 연구 프로젝트를 개시하기까지 두 달이면 족하다”고 자신했다.


그렇다면 중국 최고의 컴퓨터기업 롄샹 등이 초창기 사세를 닦은 베이징의 IT거점 중관춘(中關村)의 운명은 어떻게 되나. 2002년 중국 국영TV는 ‘중관춘과 창장의 대화’라는 기획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어느 곳이 더 하이테크 발전 가능성이 높은가를 점검하는 프로였다. 당시 TV의 전문가들은 “중관춘의 역할은 끝났다”며 창장의 손을 들어줬다. 하이테크 산업발전의 불가결 요소인 거주 및 교육여건과 산업연관 효과에서 베이징이 따라올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창장개발구 직원들의 호언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기업들이 핵심 R&D를 상하이에서 수행할 지는 의문이다. 용의 날개를 달아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주 첨단기업의 R&D를 중국의 최고 고급 두뇌들이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간단치 않다. 이미 베이징, 칭화, 푸단 등 3대 명문대학이 이곳에 연구동을 세웠다. 게다가 집적회로 업체인 화홍(華虹)처럼 해외 두뇌들까지 이곳  하이테크 투자에 앞장서고 있다. 기술유출 및 기술인력 불법 스카우트에 대한 중국 당국의 단속도 미지근하다.


요컨대 선진기업들의 핵심기술을 빨아들일 기반시설과 자금, 두뇌들이 속속 이곳에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창장개발구가 하이테크 분야에서 강력한 클러스터(Cluster)를 이루는 날, ‘IT 강국 한국’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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