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오늘의 기업들에게 주는 시사점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이 오늘의 기업들에게 주는 시사점

김범열 최나은 | 2014-06-17 |

기업 간의 경쟁에 있어서 강자의 이점은 대단하다. 그러나 때때로 약자가 강자를 밀쳐내고 선두에 오르는 일이 있다. 전력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이끈 사례는 전쟁사에서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긴 생생한 전쟁사의 사례들은 현대 기업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본 글에서는 2차대전시 독일군이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던 7가지 이유를 살펴보고, 기업들이 경영 전략 수립·실행시 고려해야 하는 시사점을 얻고자 한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전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력이 높았던 이유는 첫째, 미래를 위한 준비를 미리 차근차근 해나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차대전 이후 독일군은 여러 방면에서 군사적 제약을 받게 되었지만,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폭넓은 연구와 철저한 계획을 통해 미래를 대비한 역량을 쌓아나갔다. 둘째, 싸움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당시 일반적이었던 기관총, 참호, 요새 등을 활용한 방어중심의 전투를 준비한 프랑스, 영국과는 달리, 독일군은 전차가 중심이 되는 기갑전술을 활용한 전격전(Blitzkrieg)을 펼쳐 연합군을 무너뜨렸다. 셋째, 전력이 열세에 있을 때는 외부의 힘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독일은 당시 공산주의 도입으로 유럽에서 소외되어있던 소련과 전격적으로 군사협력 관계를 맺음으로써, 무기 실험과 훈련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프랑스 침공시 전선을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넷째, 약자가 강자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적의 약점을 찾고 적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공격해야 한다. 연합군은 독일과 프랑스 국경 전체에 강력한 요새인 마지노선을 쌓고 방어할 작전을 세우고 있었으나, 독일군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험준한 아르덴 산맥을 가로질러 공격하였고 프랑스 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째, 독일군의 가장 큰 강점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현장 지휘관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는 ‘임무형 지휘체계’이다. 현장 지휘관들에게 명확한 목표와 의도만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임무 수행 방법은 실행하는 사람에게 위임함으로써, 전쟁이라는 불확실성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여섯째, 앞서 언급한 전략들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강한 훈련을 통해 효과적인 작전 수행을 가능케 하는 구성원 역량을 확보하여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강한 훈련을 받은 독일군은 실제 전쟁에서 이를 발휘하여 위기상황에서 막힘없이 진격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독일군이 창의적인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고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승리에 대한 절박감과 치열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1차대전 이후 여러 굴욕적인 책임을 지면서 자원의 제약을 받게 된 독일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창의적 방법을 절박하게 모색한 것이다.

 


< 목 차 >


Ⅰ. 전력 열세는 극복 가능한가?
Ⅱ. 독일군은 어떻게 강한 전투력을 보유했을까?
Ⅲ. 자신만의 차별적 다름을 만들어야

 


Ⅰ. 전력 열세는 극복 가능한가?

 


과거 ’70년대 ’80년대 초 TV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던 미국 드라마 중,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프랑스 전선을 배경으로 미군과 독일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흥미진진하게 묘사한 ‘전투(Combat)’와 미군 죄수들로 구성된 특공대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게리슨 유격대(Garrison's Gorillas)’이다. 두 드라마에서 독일군들은 주인공들의 활약에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이러한 드라마나 영화들을 보면서 우리들은 무의식적으로 독일군은 제대로 싸울 줄 모르는 오합지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독일군은 그렇게 형편없는 군대였을까?


전쟁사 연구가이자 이스라엘 히브루대학 교수인 크레벨드(Martin van Creveld)는 'Fighting Power'라는 저서에서 1939년부터 1945년 사이 독일군과 미군의 전투와 관련한 방대한 자료 분석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국 연합군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지만, 독일군이 숫자가 훨씬 많은 연합군과 싸워 여러 차례 승리하였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 대 개인을 비교하면 독일 육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당했던 것보다 50% 더 높은 손실을 영국군이나 미군에게 계속 가하였다. 이것은 독일군이 공격하든 방어를 하든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수적으로 적거나 부분적으로 우세하였을 때, 공중 지원의 우세를 점하였거나 그렇지 못하였을 때, 이겼거나 패하였을 때에도 항상 그러하였다.”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폴 케네디(Paul Kennedy) 역시 그의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5년 초에 소련군은 독일군에 비해 병력 및 장비는 5배, 대포는 7배, 그리고 항공기는 17배나 많았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 주둔한 영·미 연합군은 ‘전차 20:1, 항공기 25:1의 실질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당시 독일군이 그토록 오랫동안 잘 싸운 것은 정말로 경이로운 일이다.”


독일군은 결코 약한 군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상대편보다 두 배 정도의 전투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쟁취했던 강한 군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법칙이 바로 강자의 법칙이라 일컬어지는 ‘란체스터 법칙’이다.


영국의 항공공학 엔지니어인 란체스터(F. W. Lanchester)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들 간의 공중전에서 강자와 약자 간의 전력 차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분석하였다. 그 결과 무기 성능이 같다면 일반적으로 병력이 많은 쪽이 전투에서 승리할 뿐만 아니라, 승패의 격차를 더욱 크게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양자 간의 전투 결과는 병력 차이의 제곱만큼 차이가 크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능이 같은 아군 전투기 5대와 적군 전투기 3대가 공중전을 벌인다면 최종적으로 살아 남는 아군 전투기는 2대가 아니라 그 차이의 제곱인 4대가 된다는 것이다.


전쟁뿐만 아니라 기업간 경쟁에서도 란체스터 법칙은 유효하다. 한 분석에 의하면, 2007년을 기준으로 산업별 선도기업의 지난 10년간 평균수익률이 267%인 반면 후발기업의 경우는 68%로 나타나고 있다(<표> 참조). 이렇듯 실제로 선도기업들은 고객 및 투자자의 선호, 우수인재 확보의 용이성, 비용 측면의 강점 등을 바탕으로 시장지위를 견고히 하고 있다. 인력과 자원이 열세인 기업들이 선도기업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선도기업들이 지속적으로 시장을 지배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노키아, 코닥, 서킷시티, 소니, 모토로라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한 때 시장을 호령했던 기업들이 환경 변화와 약자라고 생각했던 후발기업들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전력이 열세인 기업들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도기업을 앞지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인적·물적 자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전투력이 높았던 이유를 알아보고, 이를 통해 기업들이 열세를 극복하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시사점을 살펴보자.

 


Ⅱ. 독일군은 어떻게 강한 전투력을 보유했을까?

 


1. 미래를 대비한 역량 쌓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당시, 독일은 약 400만 명의 육군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후 독일군의 규모는 장교 4,000명을 포함해 10만 명을 넘을 수 없다는 제약을 받게 되었다. 독일군이 받은 제약은 단순히 병력 규모만이 아니었다. 독일 육군은 어떠한 전차도 개발해서 보유할 수 없었고, 공군은 존재 자체가 폐지되었다. 그리고 독일 해군의 대부분 주력함들은 자신들의 배가 영국군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는 승무원들에 의해 침몰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육군의 마지막 참모총장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의 지휘 아래 베르사유 조약의 제한 사항들을 하나하나 우회하거나 무력화시켰다. 우선 독일군은 보다 우세한 적군과 상대하게 됐을 때 병력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 그리고 지난 패배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연구하는 데 엄청난 시간을 투자했다. 또 독일군은 민간용 비행기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항공기 제작에 관한 고도의 노하우를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등 군비 제한이 풀릴 그날을 대비하여 신무기들의 제작 역량을 키워나갔다.


특히 다른 국가들에 비하면 정말로 보잘것없는 10만 명이라는 소수의 병사들이 미래 독일군의 기간을 형성할 수 있도록 철저한 훈련을 통해 역량을 키워나갔다. 젝트는 “군은 소수일수록 더욱 전문화될 수 있다”라고 설파하면서 감군을 독일군 소수정예화의 절호의 계기로 활용하였다. 따라서 독일군에 남게 된 이들은 예전에 여러 사람이 나누어 하던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었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교육되었다. 동시에 유사시에 대비해 고급 장교는 장성의 역할을, 초급 장교는 고급 장교의 역할을, 하사관은 초급 장교의 역할을, 사병은 하사관의 역할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도록 비밀리에 훈련을 했다.


이렇게 실패를 연구하고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노력을 바탕으로 독일군은 1935년 히틀러가 독일의 재군비를 꾀하겠다는 선언을 한지 불과 4년만에 300만 명의 대군으로 급성장하여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정도로 전력을 급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군사 전문가들은 독일군이 역량이 매우 탁월한 장교·하사관들을 전쟁 마지막 해까지도 투입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업 역시 미래를 내다보고 필요한 역량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포춘지가 2013년 ‘올해의 CEO’로 선정한 엘론 머스크(Elon Musk)를 보자. 그는 대학시절부터 인류가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추구해야 하고, 지구 밖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다. 즉, 21세기 중반이면 지구의 인구가 80억이 넘어 포화상태가 되고, 결국 화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다소 엉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머스크는 남들은 쉽게 상상하지 못하는 20∼3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이러한 생각에 다다를 방법을 찾아 하나씩 준비를 하고 있다. 우선 화성으로 가기 위한 유인우주선을 개발하기 위해 항공우주벤처회사 ‘스페이스X’를 설립하여 여러 번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로켓을 개발하고 있다. 스페이스X는 이미 로켓 발사에 드는 비용을 절감하면서, 국가 주도의 우주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한편 지구에서 체류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지구 온난화를 막고자 테슬라 모터스를 설립하여 전기자동차를 개발했다. 테슬라도 50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자동차 제조업체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또한 태양광 패널을 제조하는 솔라시티에 자본과 아이디어를 쏟아부어, 구글 등의 투자를 받아 2011년부터 5년간 10억 달러를 투입하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태양광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전기자동차들이 어디서든 쉽게 충전할 수 있도록 태양광으로 발전한 전기를 충전할 수 있는 ‘슈퍼차저 스테이션’을 미국 전역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머스크는 자신의 신념을 달성하기 위한 역량을 쌓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팰컨 로켓 발사가 3번 실패한 후 머스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라고 말하면서 구성원들에게 다시 힘을 내 열심히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화성에 가겠다’는 머스크의 선언을 언뜻 들으면 너무나 먼 미래의 꿈 같은 이야기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고 미리 준비해가면서 많은 꿈을 현실로 바꿔 나가는 노력이 그를 남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로 나가도록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싸우는 방식의 패러다임 변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이후 대부분의 군지휘관들은 전쟁 당시 서부전선에서 상호 소모적 교착상태를 초래했던 기관총, 대량 포격, 참호, 요새 등이 가진 막강한 방어력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지휘관들, 특히 승자 쪽에 섰던 사람들은 다시 전쟁이 발생한다 해도 이 같은 경향이 반복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방어 준비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1차대전의 패자인 독일은 오히려 1차대전의 불명예를 뒤집기 위한 새로운 해결책을 여러 방면으로 모색했고,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전차를 활용한 기갑전술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방어전 개념에 얽매인 나머지, 진지를 공격하는 보병을 지원하는 데 주안을 둔 느리고 이동 범위가 짧은 전차를 많이 만들었으며, 전차를 독자적으로 작전에 이용한 것이 아니라 보병사단에 소속시켜 보병과 함께 움직이도록 했다. 반면, 독일은 방어 중심의 소모전을 타개할 새로운 기갑전술을 창안하였는데, 여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기갑부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구데리안(Heinz Guderian)이다.


구데리안은 전차는 단독 또는 보병부대와 함께 움직이는 한 결정적인 이점을 갖지 못하며, 기동력이 생명이라고 확신하였다. 구데리안의 기갑전술의 기본 원칙은 강력한 기갑부대가 일거에 충격을 가해 전선을 급속히 찢은 후, 속도를 더해 돌파하여 적의 배후에 위치한 전략 거점을 빠르고 완전하게 제압하는 것이었다. 즉, 전차와 포병, 보병, 공군이 함께 속도를 맞춰 입체적으로 작전을 펼치는 전략이었다. 당시에는 전차는 보조적인 전력이고 전장의 주역은 보병, 돌파의 핵은 기병이 담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구데리안은 자신의 생각을 독일군 최고 지휘부에 납득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지 하에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폴란드 침공에 투입된 기갑부대는 다른 부대에 비해 3배나 빠른 속도를 보이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2차대전 중 연합군을 공포에 떨게 한 독일 전격전(Blitzkrieg) 신화의 서막을 올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연합군의 작전을 지휘하던 사람들이 폴란드에서의 독일 기갑부대의 활약상을 듣고서도 방어라는 기존 패러다임에 빠져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군 참모총장이었던 루이스 잭슨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차의 효과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전차가 출현한 상황은 예외적이었고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가능성은 없다. 만에 하나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다른 수단으로 대처하면 된다.”


전쟁에서 약자가 힘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방식들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전략이 필요하다. 구데리안의 기갑전술은 이전까지 당연시 되던 보병, 기병 위주에서 전차 중심으로 싸움의 방식을 바꿈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초반 독일군이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기업 경쟁 상황에서도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싸움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1990년대 중반 당시 스탠포드 대학원생이었던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과 래리 페이지(Larry Page)는 새로운 검색엔진을 개발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팔려고 하였지만 어떤 기업도 사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야후의 공동 설립자인 양(Jerry Yang)과 필로(David Filo)는 그들의 검색엔진에 대단히 감탄했지만 ‘검색 결과의 연관성이 좋을수록 검색자들이 야후 사이트를 빨리 벗어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야후의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 기술을 구매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며 인수를 거절하였다. 결국 브린과 페이지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스스로 사업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기업이 바로 오늘날의 구글(Google)이다.


야후가 구글 인수를 거절한 이유는 바로 이전까지 인터넷에서 많이 활용되던 광고가 배너 형태였기 때문이다. 배너광고의 가격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얼마나 노출되는가를 기준으로 단가가 결정된다. 이는 신문 광고의 단가 계산법과 비슷한데, 광고의 단가가 구독자수와 비례하고 광고의 크기와 위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구독자가 그 광고를 보는지 여부는 단가 계산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클릭률을 통해 배너의 클릭 회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광고비는 단순 노출에 의해서만 계산되고 사람들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보았는지는 반영되지 않는다.


그런데 구글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인터넷 광고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검색광고가 바로 그것인데, 키워드를 검색하면 관련된 업체의 링크를 맨 위에 제공한다. 이 사이트를 클릭할 때 마다 광고주는 광고비를 구글에 지불하게 된다. 각 키워드에 대한 광고 가격도 경매를 통해 정한다. 검색광고가 이전과 차별화되는 가치는 광고의 타겟을 좀 더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해당 키워드를 궁금해하는 사람일수록 관련 업체의 광고에 관심이 높아질 것이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반적인 배너광고를 클릭할 확률은 0.5%이지만 검색 결과로 나온 광고를 클릭할 확률은 2~13%라고 한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70%의 사람들은 검색 광고의 결과는 광고로 인식하지 않고 정보로 인식한다고 한다. 이렇게 단순 배너 광고에서 검색광고로 광고 수익 모델의 패러다임을 바꾼 구글은 2000년대 초반 난립하던 인터넷 검색 기업들을 누르고 독보적인 검색업체의 강자로 등극하였다. 2013년 구글의 매출은 598억불이며, 매출액 중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85%이다. 이처럼 싸움의 룰과 판을 바꾸는 것이 약자가 기존의 룰에 익숙한 강자를 이기는 방법이 될 수 있다.


3. 외부의 힘을 적절히 활용


전력이 열세에 놓여있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을 때 자신만의 힘으로 이러한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경우 외부의 힘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많은 문제가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전투 역량을 높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독일군이 가장 어려움을 느꼈던 부분이 연합군 모르게 새로 개발한 장비나 전술을 실험해보는 것이었다. 이에 독일은 1922년 소련과 비밀리에 군사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각국이 공산주의의 등장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소련은 유럽에서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은 외교적 상황에 서로 필요성을 느낀 독일과 소련은 군사협력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를 통해 소련은 독일의 앞선 기술력을 전수 받을 수 있었고, 독일은 소련이 제공한 비밀 장소에서 마음 놓고 개발한 무기를 실험하고 새로운 전술을 훈련해볼 수 있었다.


또한 독일은 1939년 8월, 소련과 몰로토프-리벤트로프 협정(Molotov-Ribbentrop Pact)을 체결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전혀 함께 어울릴 여지가 없어 보였던 소련과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의 전략적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스탈린이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이유는 점점 강해지는 독일이 소련을 공격해올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스탈린은 독일과의 사이에 더 많은 완충지대를 둘수록 소련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의 절반을 주겠다고 히틀러가 제안하자 기꺼이 독일을 도와 궁지에 몰란 폴란드를 등 뒤에서 공격했다. 한편, 독일은 소련을 한편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설사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을 공격하더라도 소련은 그에 합세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을 얻게 되었다. 2년 후 이 두 나라는 다시 적으로 돌아서 동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한가지 아이러니한 사항은 1920년대 소련에 들어가 군사 훈련과 연구에 매진했던 수많은 독일의 소장파 장교들이 나중에 소련을 패망 일보직전까지 몰아붙인 주역이 되었다는 점이다.


천하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기업이 위기 상황하에 있을 때에는 외부의 힘을 빌려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수세에 몰린 애플(Apple Inc.)에 돌아온 잡스는 복귀 이듬해에 폭탄 선언을 한다. 애플의 새로운 파트너로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와 협력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은 저작권 및 특허권 문제로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이 협력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향후 애플의 생사와 중요한 투자가 걸린 문제였으므로, 잡스는 빌 게이츠(Bill Gates)에게 협력과 도움을 요청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요구한대로 애플의 기본 브라우저를 인터넷 익스플로러로 하는 등의 조건을 수락하는 대신, 잡스는 게이츠에게 맥(Mac)을 위한 소프트웨어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애플에 투자해줄 것을 요청했다. 애플 내부에서 마이크로소프트와 협력하는 것에 대한 저항도 없지 않았지만, 잡스는 “건강한 애플을 다시 만들고 싶다면, ‘마이크로소프트가 이기면 애플은 지는거다’라는 개념을 버려야 한다”며 외부 파트너와의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추진력으로 인해 애플은 기업의 재도약을 추진할 수 있는 불씨를 살릴 수 있었으며, 그 발표가 이루어진 날 애플의 주가는 급등하였다.


4. 적의 약점을 찾고, 적이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공략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로 유명한 영국군 장교 로렌스는 1918년 1차대전 중 수에즈 운하의 지배권을 두고 영국과 터키가 대립하고 있던 아랍에 파견된다. 로렌스는 터키군 공격을 위한 전략적 거점 확보를 위해 홍해 북단에 위치한 아카바(Aqaba) 항구를 점령할 것을 생각했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을 내놓았다. 모세 이후 누구도 건너지 못했다고 전해지는 네푸드(Nefud) 사막을 종단한다는 것이다. 모두의 만류에도 로렌스는 작전을 감행하였고, 바다로부터의 공격에만 대비하고 있었던 터키군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아카바를 내주게 된다. 이처럼 약자는 적의 약점을 공략하고 예상치 못한 방식의 공격이 필요하다.


2차대전 중이었던 1940년 독일은 프랑스 및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연합군에게 수적으로 열세에 몰려 있었다. 더구나 지하에 구축한 각종 전투 시설물과 토치카를 서로 통합하여 만든 강력한 요새인 마지노선(Maginot Line)이 독일과 프랑스 국경 전체에 걸쳐 구축되어 있었다.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독일군이 침공한다면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하는 방법밖에 없으며, 이 경우 연합국 군대는 대기하고 있다가 대응하면 진격해 오는 독일군을 간단하게 분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때 독일군의 만슈타인(Fritz Erich von Manstein)장군은 기습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적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침공로를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여 제시했다. 즉, 만슈타인은 기갑부대를 집중하여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통로를 급속 돌파해 적의 배후를 단절함으로써 적의 주력을 포위하여 섬멸하자는 작전을 주장한 것이다. 만슈타인이 제시한 회심의 통로는 아르덴(Ardennes) 구릉지대였다. 아르덴 산맥은 말 그대로 여러 개의 울창한 산이 겹쳐져 있고 산세가 험하여, 독일군 자체도 작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프랑스 역시 독일군이 그 지역으로는 절대 넘어올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하며 소홀히 했던 지역이다. 1차대전 시 가장 치열했던 베르댕(Verdun) 전투의 영웅인 프랑스의 앙리 페탱(Henri Pétain)원수도 “아르덴 고원을 통과할 수 있는 군대는 없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은 안전하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만슈타인은 이런 이유 때문에 아르덴이 최적의 공격 통로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전에 공병대를 투입하여 진격로를 미리 개척한 후 기갑부대를 은밀히 전진 배치시켜놓으면 전쟁이 개시되었을 때 이곳을 순식간에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독일군내에서도 작전 실행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독일군은 전차를 앞세워 아르덴을 돌파하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고, 4일만에 프랑스 방어선을 통과했다. 평원에서 참호를 깊게 파고 독일군을 막으려고 했던 프랑스군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등장한 독일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다고 일컬어지던 프랑스가 불과 6주만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기업 간 경쟁에 있어서도, 후발 기업이 앞선 선두 기업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역발상이 필요하다. 1997년 대형 비디오 대여 체인 블록버스터(Blockbuster)가 성업 중일 때, 넷플릭스(Netflix)의 창업주 리드 헤이스팅스(Reed Hastings)는 비디오와 DVD를 택배나 우편으로 배달하는 역발상 비즈니스를 고안해냈다. 비디오 대여 연체료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 그는, 고객이 원하는 DVD를 우편으로 배송해주고 우편함에 반납하도록 하며 연체료는 받지 않는 파격적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최신 영화 중심으로 대여 서비스를 하던 블록버스터와 달리, 과거의 명작들을 고객에게 추천하는 방식으로 마니아 층을 늘렸다. 또한 넷플릭스는 DVD배송사업이 치열해지자, 2007년 인터넷으로 영화를 서비스하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확장하였다. 월 7.99달러를 내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받는 회원 수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4,000만명에 이른다. 이에 반해, 한 때 6,000여 개 매장을 운영하며 업계 1위로 군림하던 블록버스터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2010년 도산하였다. 헤이스팅스는 “뻔한 사업이었으면 블록버스터와 아마존이 이미 하고 있었을 것이다...많은 기업들이 우리 모델에 주목하지 않았지만 바로 그 부분이 우리를 성장하도록 만들었다.”라고 하며 후발 주자에게는 선두 기업과 차별화된 전략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5. 현장 지휘관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 임무형 지휘체계


프러시아는 1806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크게 패하자, 군사 제도의 대 개혁을 도모하였다. 이 개혁을 주도한 샤른호르스트(Gerhard von Scharnhorst)는 패배의 원인을 ‘사고의 경직성’과 ‘지휘관들의 피동적인 지휘’에서 기인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당시의 지휘관들은 모든 사소한 일까지 상부로부터 명령으로 하달되길 기다리며 전투다운 전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독일군이 새롭게 정립한 원칙이 바로 ‘임무형 지휘체계(Mission-oriented Command System)’이다.


많은 군사 전문가들은 2차대전 시 독일군이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 역량이 높았던 핵심 이유가 바로 하급 지휘관의 능동적 판단과 재량을 통해 실행력을 극대화하는 임무형 지휘 체계의 활용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임무형 지휘체계는 명확한 목표 및 의도는 제시하되, 세부적인 명령은 지양하고 임무 수행 방법은 실행하는 사람에게 위임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즉, 명령은 심플하고 명확하게 내리고, 전체 목표와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달성 방안은 스스로 고민하여 실행할 수 있는 재량권을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체계인 것이다.


독일의 폰 클루게(Günther von Kluge) 장군은 임무형 지휘체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독일군이 사용하는 전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급 지휘관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임무 지침이다. 이러한 행동의 자유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도식적이고 교과서적인 접근법에 비해 독일군이 전술적 우위를 가질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1940년에 씌어진 독일 기갑사단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독일 기갑부대가 원하는 장교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동부대의 지휘에 있어 고정된 공식을 원하는 학자 타입의 장교는 즉시 기갑부대의 상징인 검은 전투복을 벗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장교는 기갑부대의 정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불확실성이 높고 수많은 상황들이 발생하며, 이런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대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예측하지 못한 돌발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전쟁 상황에서 임무형 지휘체계는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전쟁사가들은 전투 현장에서의 분권적인 결정을 강조하는 독일의 작전교리가 신중하면서도 단편적인 영국의 전술, 잔인한 소련식 전면공격전술, 그리고 열성적이지만 전문적 체계가 부족한 미국식 돌격전술에 비해 훨씬 뛰어났다는데 사실상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불확실성이 높은 것은 경영 환경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식료품체인 기업 웨그먼스 푸드(Wegmans Food Markets)가 이런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무기는 바로 현장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직원들이다. 일반적인 식료품점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최전선의 직원들은 매뉴얼에 따라 고객의 요청에 대응한다. 그러나 웨그먼스 푸드는 이러한 매뉴얼을 폐기하고, 직원들이 매장에서 고객을 자유롭게 응대하도록 하고, 이들에게 의사결정 전권을 부여한다. ‘단 한 명의 고객도 불만족해서는 안 된다(No customer leaves unhappy).’는 모토 아래 직원들은 고객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매니저를 거치지 않고 어떤 일이든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다.


이렇게 구성원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은 회사가 종업원의 역량을 개발하기 위한 교육 훈련에 투자하여 그들을 전문가로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치즈 담당 직원에게는 스위스의 낙농업을 견학시켜주거나, 와인 담당자에게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으로 연수를 갈 수 있도록 지원한다. 구성원 1인당 연간 40시간의 교육을 필수적으로 이수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할 정도로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고객들이 웨그먼스 푸드에서 고기를 사려고 하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직원에게서 고기 및 그와 곁들일 수 있는 주류 등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받게 되어, 고객들의 서비스 만족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고객 서비스 품질로 인해 웨그먼스 푸드의 면적당 매출은 해당 업계 평균보다 50% 가량 높다(2010년 기준).


6. 전략 실행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는 강한 훈련


효과적인 작전 실행을 위해서는 강한 훈련을 통한 구성원 역량을 우선 확보해야 한다. 예를 들어, 2차대전에서 독일군 기갑사단장으로 활약했던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장군은 기갑부대의 장점인 돌파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병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만고만한 강과 구릉지대가 연속된 프랑스 평원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돌파를 계속하려면 통로를 충분히 개척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공병대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롬멜은 공병대를 앞세워 험지에 진로를 개척하고 하천을 도하하여 전진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롬멜은 ‘반복된 엄격한 훈련이 부대원들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해줄 뿐만 아니라 전시의 사상자 수도 줄여준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에 항상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또한 그는 훈련 시에도 뒤에 서 있지 않고 현장에서 진두 지휘함으로써, 그의 부대가 적의 총알을 무서워하지 않고 전진하도록 단련시켰다.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군은 교량을 파괴하여 독일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롬멜은 이미 성한 교량이 없다는 최악의 전제하에 그의 부대를 훈련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찰대가 파괴된 진격로를 발견하면 곧바로 공병대가 보수하고 바로 전차가 지나가게 하면서 커다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축적된 역량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렇게 개별 구성원들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알고 일찍부터 실행한 기업이 바로 GE(General Electric)이다. GE는 사업이 다각화되고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의 중앙 집권적 경영구조로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각 사업부에 주요 의사결정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분권화를 실행했다. 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사업을 책임질 수 있는 다수의 리더를 육성하고 확보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고 1950년대부터 본격적인 인재관리에 들어갔다. 전사 차원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평가·관리하는 EMS(Executive Manpower Staff)조직을 가동하고, CEO가 직접 핵심인재의 업무 부여, 교육, 평가·보상 등을 챙겼다. 특히 GE에서 중요시 한 것은 핵심인재에게 다양한 사업과 업무를 맡겨 역량을 육성시키고 검증하는 것이었다. 의도적으로 다양한 분야, 지역, 신사업 등의 현장에서 도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경험을 쌓도록 함으로써, 사업가적 역량을 배양하였다. 특히, 신흥 성장 시장을 중심으로 LGT(Local Growth Team)라는 조직을 독립적으로 운영함으로써, 혁신적인 사업가 육성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구성원들이 다양한 도전 과제를 맞닥뜨려 대응하는 경험과 역량을 쌓도록 하는 것은 점점 예측이 어려워지는 현대의 경영 환경 하에서 가장 효과적인 훈련 방법의 하나일 수 있을 것이다.


7. 승리에 대한 절박감과 치열함


독일군이 창의적인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 내고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핵심 원동력의 기저에는 승리에 대한 절박감과 치열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모든 전쟁의 책임을 지게 된 독일은 최악의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배상금과 영토 축소를 포함하여 독일에게 부여된 모든 책임들이 보통의 수준을 넘어 과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독일 국민들뿐만 아니라, 전쟁 전 최강의 군대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군부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언젠가 이 치욕을 갚겠다는 승리와 복수에 대한 열정을 자극했다.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지속적으로 약자로서의 굴욕을 씻을 수 없다는 절박감, 이를 위해 전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강력한 동기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전략을 창조하게 하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전술도 성공시키게 한 것이다.


또한 독일의 지리적 위치, 전투 자원에 있어 상대적인 경제적·물질적인 제약도 그들로 하여금 절박감을 갖게 하여 창의적인 방법을 찾도록 하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독일은 서부전선에 프랑스, 동부전선에 소련 등 사방으로 군사 강국에 접해있었다. 또한 석유 등 군수물자 보급도 쉽지 않았고 지속적인 병력 확보도 문제가 있었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우 연합군이 확실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전쟁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었던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독일은 전투자원의 열세를 극복하고, 단기간 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도입해야만 했다. 이러한 환경적 제약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보다 창의적이고 과감한 전략·전술을 창안하고 실행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기업의 경우도 절박감은 종종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한계를 넘어 큰 성과를 올리는 지렛대로 작용한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사(Southwest Airlines)의 그 유명한 ‘10분 회전’ 사례를 살펴보자. 1971년 6월 3대의 비행기로 취항을 시작한 사우스웨스트는 주외(州外) 노선을 개발하고 기존 정규 노선을 증편하기 위해 4번째 737기를 사들였다. 그러나 연방 법원이 텍사스 이외의 지역에 취항할 수 없다고 판결하자 그 비행기는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따라서 사우스웨스트는 구입한 지 8개월 만에 비행기를 타 항공사에 팔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4대를 가지고 운영하기로 했던 새로운 운항 스케줄을 3대를 가지고 해내야 하는 새로운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난제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지상의 정비 요원들이 착륙한 회사 비행기를 10분 이내에 정비하여 회전시킬 수 있다면, 3대로도 운항 스케줄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즉, 비행기가 게이트를 들어와서 탑승객을 내리고 다시 탑승객을 받아서 게이트를 빠져나가는 것이 10분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보잉사, 연방 항공청, 기타 항공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10분 회전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우스웨스트는 모든 구성원들이 회사의 운명이 걸린 절박함 속에,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강력하게 밀어붙여 결국 10분 회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한 구성원은 “우리의 생존이 10분 회전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우스웨스트의 CEO였던 켈러허(Herb Kelleher)도 “사우스웨스트의 직원들은 자기 일이 회사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열정, 에너지, 열광, 목적의식 등을 일 속에 쏟아 붓는다.”라고 언급하였다. 결국 사우스웨스트는 정기 스케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항공업계 내에서 정시 발착을 가장 잘 지킨다는 전통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Ⅲ. 자신만의 차별적 다름을 만들어야

 


모두들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패하였다. 패전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을 수 있지만, 당시 독일을 이끌었던 히틀러에게 상당부분 기인한다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히틀러는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고 난 후 그 약점을 이용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능력을 활용하여, 독일 총통으로 취임한 1933년부터 1940년 여름의 프랑스 점령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연속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초반의 믿기 힘들 정도의 커다란 성공에 도취된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과신과 자기 신념에 맹목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모든 일에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한 예로 독일군의 군사력이 열세로 몰리고 있는데도 공격만이 최고의 방책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히틀러는 오로지 공격만을 고집했고, 이러한 히틀러의 행태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부전선에서 소련과의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던 구데리안은 외무상에게 서부전선에서 휴전을 맺도록 히틀러를 설득시켜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날 저녁 곧바로 구데리안은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히틀러는 며칠 후 전쟁 수행에 있어 구데리안의 필요성을 충고하는 측근들의 말을 받아들여 그를 풀어 주고, 직책도 유지시켜 주었지만 독일군 내부에 그로 인한 충격까지 거둬들일 수는 없었다.


저명한 군사전략가 베빈 알렉산더(Bevin Alexander)는 그의 저서 ‘히틀러는 왜 세계 정복에 실패하였는가’에서 히틀러가 세계 정복을 코 앞에서 놓친 근본 요인은 만슈타인, 구데리안, 롬멜 등 유능한 독일 장군들의 중요한 조언을 무시하고 본능적 육감에 근거한 자신의 판단을 고집하였던 오만과 독선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기업 역시 최대의 위기는 성공 뒤에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짐 콜린스(Jim Collins)는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How the mighty fall)’에서 잘나가는 기업들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첫 단계가 바로 성공에서 오는 오만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만에 빠진 기업은 고객, 직원 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시각만을 정당화하는 자기파괴적 습관에 빠져 환경 변화에 따른 적절한 변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군에게서 우리는 기업들이 열세를 극복하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독일군이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기와 전략을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활용한 것처럼, 남과 유사한 전략이 아닌 ‘한계 극복을 위한 차별화된 나만의 방식’을 찾고 실행해야 한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그의 저서 ‘다윗과 골리앗’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골리앗과 동일한 결투 전략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즉, 약자들은 강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또한 강자들의 강점은 관점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약점이 될 수도 있고, 약자들은 이것을 이용해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기업들은 지속적인 학습과 관찰을 통해 향후 산업, 기술 등의 움직임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고객이 느끼는 불편함이 무엇인지 섬세하게 살펴야 한다. 그리고 한발 앞서 핵심 변화를 감지하고,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물론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대부분의 기업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검증되어 관행처럼 굳어진 일하는 방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에 어긋나는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 문제는 기존의 성공 방식이 항상 유효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시대에 뒤떨어질 수 있고 심지어 미래 성공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들은 기존에 해오던 것과 다르다고 해서 독특한 아이디어나 새로운 방식을 단순히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남과 차별화된 자신만의 다름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것인지 못지않게 무엇을 하지 않을까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을 다 잘하겠다’는 식의 의욕만 앞세우는 경우,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결과물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전략적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고객이 감탄할 수 있는 명확한 경험과 의미를 제공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베트남의 전쟁 영웅인 보 구엔 지압(武元申) 장군은 전쟁에서의 승리 비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美, 中, 佛과 같이 강한 군대와 싸우면서 우리가 한 건 별로 없습니다. 세 가지를 하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았고, 그들이 싸우고 싶어하는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았으며,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웠습니다.”


둘째, 현장의 자기주도성을 높여야 한다. 전쟁터 못지 않게 이제 기업을 둘러싸고 있는 경영 환경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주도성이 낮은 조직은 구성원들이 위기를 인지하더라도, 조직의 문제를 묵인하거나 문제 발생의 원인을 남 탓으로 전가하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기업 리더는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핵심 업무를 제외하고, 구성원들에게 실행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여 그들이 미래지향적 사고를 기반으로 능동적으로 목표 달성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강구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리더는 ‘오늘날의 기술 변화와 시장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목적과 대의가 빛을 발하도록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와 같은 질문을 기반으로, 구성원들이 ‘왜(Why)’ 해야 하는지를 먼저 인식하게 해야 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차별화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 하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구성원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자기주도도성을 높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현장의 자기주도성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조직 역량 구축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선, 철저한 사전 훈련을 통한 개인 능력의 극대화가 필요하다. 또한 지속적인 임무 부여와 관찰을 통해 부하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파악된 역량을 기반으로 적재적소에 인재를 활용해야 한다. 또한 상호이해, 신뢰를 바탕으로 방법 등에 있어 의견 차이가 발생할 경우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철저한 책임감과 엄정한 규율이 전제되어야 한다. 권한을 위임한다는 것이 결코 구성원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부사장(Vice President)들이 임명될 때마다 ‘맡겨진 책임에 대해 주도성을 가지고 일하고, 어떤 이유든 간에 발생한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단순 잡역부(Janitor)라면 이유가 중요하다. 하지만 CEO와 단순 잡역부 사이 어디엔가부터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부사장이 됨으로써 이제 그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일군을 강하게 만든 핵심 원동력은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치열함과 절박감이라고 판단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절박감이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그러한 노력은 결국 성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시장선도에 대한 생산적인 절박감, 절실함은 대담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이끌어 내고 이를 실행에 옮기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뜻한 대로의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는 노력과 끈기를 가지고 실제로 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단기간의 실행을 통해 획기적인 성과를 창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려움이 있어도 지향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지속적인 실행이 수반되어야 한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견뎌내며, 결국 절박감을 가지고 끝까지 치열하고 집요하게 몰두해서 목표를 실현해 내는 것이야 말로 조직의 역량을 강하게 만들고 탁월한 성과를 만들어 내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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