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통신 기업이 과점하고 있는 셋톱박스 시장에서 제품 고급화, 소매 판매 증대 등의 환경 변화로 가전기업의 활약이 기대되고 있다.
셋톱박스(Set-Top Box)란 말 그대로 TV 위에 놓는 박스를 의미한다. 케이블 및 위성 방송이 보급되면서 셋톱박스는 일상 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친숙한 제품이 되었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관심을 받아 오지 못했다. 소비자들은 셋톱박스를 유료 방송시청을 위한 방송 설비로 생각하고 있으며, 방송국으로부터 임차해서 사용하는 만큼 자기 소유의 제품처럼 애착을 가지지 않아 왔다. 셋톱박스를 제조하는 전문 통신 기업들도 방송사와 직거래를 하는 만큼 제품 자체보다는 방송사와의 원만한 관계를 가지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또한 방송 신호의 암호화 기술을 제외하고는 셋톱박스의 기본적 사양은 제품간에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그러나 최근 셋톱박스를 둘러싼 환경에 변화가 생기면서 셋톱박스에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디지털 기술이 접목된 셋톱박스의 다양한 기능에 소비자들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소니, 도시바, 마쓰시타 등 주요 가전 기업들이 셋톱박스 사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과연 셋톱박스 산업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폐쇄형 시장 중심의 과점적 시장
지금까지 셋톱박스 시장은 방송사와 직접 거래하는 폐쇄형 시장(Closed Market)을 중심으로, 일부 선두 기업들이 과점하고 있는 특징을 보여 왔다. 이러한 특징은 셋톱박스의 주된 용도가 유료 방송 시청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유료 방송 사업은 고정비 비중이 크며 가입자 증가에 따른 변동비는 적어, 통신서비스 사업처럼 가입자 확보가 매우 중요한 성공 요소가 된다. 특히 유료 방송 초기에 방송 사업자는 수익성 확보를 위한 일정 수준의 가입자 확보가 절실했다. 따라서 방송사는 통신서비스 사업자의 단말기 보조금 지급과 유사한 셋톱박스 저가 임대를 통한 적극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했다. 이때부터 방송사가 제조 기업으로부터 셋톱박스를 대량 구입하는 폐쇄형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현재 전체 시장의 80% 정도가 폐쇄형 시장이다.
이러한 폐쇄형 시장에서는 방송사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통신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우선 Thomson, Motorola, Scientific Atlanta 등의 기업은 방송 장비, 전송 시스템, 셋톱박스 등 방송과 관련된 모든 H/W를 일괄 제공하며 방송사에게 One-Stop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일례로 Thomson은 DirecTV에게 사업 초기부터 방송 장비를 공급하였고 현재까지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Echostar, Huges 등은 방송사와 지분 출자 관계를 통해 지속적인 공급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상위 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Motorola와 Scientific Atlanta의 경우 북미 케이블 방송용 셋톱박스 시장을 복점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접목으로 고급화되는 셋톱박스
그런데 최근 들어 안정적인 시장 및 경쟁 구도를 보이던 셋톱박스 시장에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우선 디지털 방송 보급과 함께 셋톱박스의 고급화가 진행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이 접목되면서 셋톱박스에 녹화/재생 및 쌍방향 기능의 추가와 다양한 AV 기능의 복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먼저 추가되고 있는 기능은 디지털 방송의 고화질 녹화이다. AOL-TimeWarner 등 주요 방송사들은 디지털 방송 컨텐츠를 간편하게 검색, 녹화할 수 있는 PVR(Personal Video Recorder) 서비스를 부분적으로 시작하였으며, 향후 2~3년 내에 전면적인 실시를 계획하고 있다. 서비스 실시와 함께 소비자들의 인지도도 상승하고 있는데, 시장 조사기관인 In-Stat Group의 2003년 조사에 따르면, 북미 소비자의 60%가 PVR 기능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PVR 기능을 가진 셋톱박스의 출시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2002년 90만대에서 2005년에는 900만대로 증가할 전망이다.
또한 VOD(Video On Demand), 쌍방향 비디오 게임, T-commerce 등 쌍방향 기능이 추가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쌍방향 방송과 관련하여 MHP(Multimedia Home Project) 등의 표준이 정립된데다, 가입자 확보의 한계에 다다른 방송사들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쌍방향 방송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Charter Communica-tion, AOL-TimeWarner 등 케이블 방송사는 VOD 서비스의 전면적 실시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고화질 컨텐츠의 개별 전송 인프라 미비, 흥미를 끌만한 컨텐츠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전면적인 실시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쌍방향 기능의 추가와 함께 DVD Player/ Recorder, 디지털 오디오 등 다양한 AV 제품들이 셋톱박스에 복합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AV 컨텐츠 프로세싱을 위한 H/W 기반이 유사하며, 가정 내에서 TV 혹은 스피커에 연결되어 AV 컨텐츠를 즐긴다는 사용 환경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특히 DVD Recorder의 경우 방송 녹화가 주된 기능이므로 셋톱박스에 복합되는 것은 필수적이다.
셋톱박스의 소매 판매 확대 예상
또 다른 변화는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 전환, 방송사의 소매 판매 유인 증대, 정책적 규제 등으로 소매를 통한 셋톱박스 판매가 증대된다는 것이다.
첫째, 북미, 유럽, 일본 등의 주요 국가들이 2004년까지 디지털 지상파 방송을 개시할 예정이므로, 디지털 지상파 방송을 시청하려는 소비자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시장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분리형 디지털 TV로 디지털 지상파 방송을 시청하기 위해서 더욱 많은 소비자들이 소매점을 통해 디지털 지상파 셋톱박스 구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미국 FCC의 지상파 일체형 TV 판매 의무화 등 정책적 규제로 인해 증가세가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케이블, 위성 등 유료 방송사들은 경영악화, 복합화 대응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소매 판매를 증대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방송사들은 경영성과가 악화되고 있어 셋톱박스 보조금 및 관련된 제반 비용을 축소시키려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여러 기능이 복합된 다양한 셋톱박스들을 방송사들이 직접 대응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DVD Player/ Recorder, 디지털 오디오, PVR, 쌍방향 등 다양한 기능의 조합은 무수히 많고 이 모든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직접 전달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송사들은 방송사의 인증을 받은 셋톱박스가 소매에서 판매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이 셋톱박스 생산 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면서도 비용을 줄이고 복합화에 쉽게 대응할 수 있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이미 DirecTV, Echostar, BskyB 등과 같은 위성 방송사는 이러한 판매 방식을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셋째, 미국의 경우 셋톱박스 시장을 개방형 시장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적 규제를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OpenCable 규격의 시장 정착을 추진하고 있다. 만일 OpenCable이 정착된다면 셋톱박스의 판매는 방송사 의지와 관계없이 모두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표준 문제, 이해관계자간의 의견 조율 등으로 지체되고 있으며, 규제 기관인 FCC 역시 당초 보다 1년 이상 늦춰진 2006년으로 의무화 시점을 연기하였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정책적 규제에 의해서 셋톱박스가 소매에서 판매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주요 경쟁 요소의 변화로 가전 기업에게 유리
셋톱박스의 고급화, 소매 판매의 확대 등 환경 변화는 셋톱박스 사업의 주요 경쟁 요소를 변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즉, 기존의 사업 환경 하에서는 주요 성공 요소가 방송사와의 긴밀한 파트너쉽 형성이었으나, 앞으로는 제품력과 마케팅 역량이 추가될 전망이다. 우선 셋톱박스의 고급화가 이루어지면서 제품력의 뒷받침 없이는 경쟁이 어려워질 것이다. 방송사가 제공하는 부가 서비스를 원활히 구현하며, DVD Player/ Recorder, 디지털 오디오 등 다양한 AV 기능이 복합되는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소매를 통한 판매가 증가되므로 브랜드력, 유통 장악력 등 마케팅 역량 등이 주요 성공 요소로 추가될 것으로 판단된다. 소비자들이 셋톱박스를 직접 소매에서 구매하므로 친숙한 브랜드 이미지를 보유하고 소매 유통망을 확보한 기업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공 요소 변화로 가전기업에게는 매우 유리한 경쟁 여건이 조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폐쇄시장을 중심으로 경쟁 환경에 노출되지 않았던 전문 통신 기업들은 제품력과 마케팅 역량 차원에서 가전기업에 비해 뒤쳐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전 기업은 DVD 플레이어, VCR, 미니컴포넌트 등과 같은 유사 제품을 생산한 경험을 토대로 전문 통신 기업에 비해 복합화에 훨씬 쉽게 대응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가전기업은 그간 소매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획득한 브랜드 파워와 노하우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소비자가 양판점에서 셋톱박스를 직접 구입한다면 생소한 전문 통신 기업의 제품 보다는 친숙한 가전 기업의 제품을 구입할 가능성이 크다.
컨버전스 및 홈 네트워킹 대응 차원에서도 중요
가전 기업에게 셋톱박스는 시장 자체의 매력도 이외에 컨버전스, 홈 네트워킹 대응 등 전략적으로도 중요성이 매우 크다. 우선 다양한 기기들이 컨버전스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 셋톱박스 사업으로의 진출은 필요하다. 일례로 유료 방송이 더욱 확대될 경우 셋톱박스로 DVD Player/ Recorder 기능이 모두 융합되어 단품 판매가 불가능해지는 극단적인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향후 가전의 새로운 전기를 제공할 것으로 예상되는 홈 네트워킹에 대한 대비를 하는 차원에서도 셋톱박스의 중요성은 크다. 현재 가정 내의 각종 기기들이 연결되는 홈 네트워킹의 중심 제품으로 PC, 게임콘솔, 셋톱박스, 냉장고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 이중에서 홈 네트워킹의 Killer Application인 디지털 컨텐츠 공유 기능을 수행할 유력한 후보 제품은 현재 방송 컨텐츠의 수신을 담당하는 셋톱박스일 것이다. 시장 조사기관인 Ovum의 경우 2005년까지 전세계 4백만 가구에 셋톱박스 기반의 엔터테인먼트 서버가 보급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을 감지한 선진 가전기업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눈에 띄고 있다. 소니의 경우 이미 Cablevision Systems, DirecTV 등의 방송사와 파트너쉽을 형성하고 있으며, 홈 네트워킹 중심 제품에 대한 대비로 2002년 셋톱박스에 PVR, 네트워킹 기능을 추가한 Cocoon을 개발하였다. Cocoon은 리눅스 기반의 디지털 셋톱박스로 160기가의 HDD가 탑재되어 HD급 방송을 15시간 녹화할 수 있다. 또한 사용자의 기호를 스스로 판단해 자동으로 방송을 선택 및 녹화하는 기능을 갖추었고, 네트워크를 통한 인터넷 접속, 원격지 녹화 예약, 자동 업그레이드 등이 가능하다. 소니는 앞으로 여타 디지털 가전과 연결성을 높여 Cocoon을 홈 네트워킹의 중심 제품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 도시바의 경우도 2002년에 무선 네트워킹, PVR 등의 기능을 가진 디지털 셋톱박스인 TransCube10을 개발하였다.
방송사와의 파트너십 구축 등 적극적인 시장 공략이 필요
셋톱박스를 둘러싼 환경 변화는 국내 가전 기업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유리한 경쟁 여건이 조성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품이 고급화되면서 사업 자체에 대한 매력도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기회를 충분히 활용해 셋톱박스 시장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면 향후 홈 네트워킹 시장 진출을 위한 든든한 디딤돌을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국내 가전 기업은 보다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할 필요가 있으며, 현재 부족한 역량인 방송사와의 파트너쉽 구축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방송사의 인증이 없으면 셋톱박스의 소매 판매가 불가능하며, 방송사는 향후 홈 네트워킹 서비스를 제공할 유력한 후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전기업들은 쌍방향 서비스 등의 신규 서비스에 대한 투자 여력이 없는 방송사들에게 재정적, 기술적 도움을 주면서 지속적인 공급관계를 구축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