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경쟁자가 더 이상 오늘의 경쟁자가 될 수는 없다. 산업, 영역간의 파괴로 기업간의 경계가 더욱 모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동종업체에 국한한 근시안적 경쟁에서 벗어나 경쟁상대를 새롭게 설정할 지혜가 필요한 때다. 선진 기업들의 사례를 바탕으로 영역 파괴 현상에 대응하는 기업 전략을 살펴본다.
어제의 경쟁자는 더 이상 오늘의 경쟁자가 아니다. 산업, 영역간의 파괴로 기업간의 경계가 이미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기술간의 동반발전, 여러 기능을 혼합한 다기능 제품, 토탈 솔루션을 지향하는 복합서비스 등의 등장은 이와 같은 영역 파괴 현상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경쟁 대상이 이종 업체로까지 확대돼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무한 경쟁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인터넷과 금융을 결합한 휴대폰 소액 결제 서비스는 그 대표적인 사례. 2000년 등장한 이 서비스는 첫 해 50억원에 불과했던 시장규모가 지난해 1,000억원대로 커졌다. 올해는 2,000억원대로 확대될 전망이라고 한다(<그림 1> 참조).
이와 같은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신용결제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를 누려왔던 신용카드 업계다. 과거에는 동종 카드사와의 경쟁에만 신경을 쏟았다면 이제는 휴대폰 업계가 잠재적 경쟁자로 등장한 셈이다.
거꾸로 신용카드 업계가 백화점 업계에 새로운 경쟁자로 부각되는 경우도 있다. 신용카드와 상품권 기능을 혼합해 한도 금액 내에서 백화점 결재가 가능하도록 만든 ‘기프트 카드’가 그것이다. 결과는? 백화점 상품권 시장의 잠식이다.
소비자 파이낸싱을 확대하고 있는 자동차 업계와 금융기관과의 경쟁 역시 눈에 띤다. GM의 경쟁자는 더 이상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아니다. 자동차 할부 금융, 보험 등이 연관된 자동차 파이낸싱 부분이 어느새 전체 매출의 11%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카슈랑스로 인해 은행업과 보험업간의 경쟁 역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도 은행의 보험업 진출을 대비, 금융자회사나 제휴의 방식을 통한 이업종간 합종연횡이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보험회사인 푸르덴셜사는 ESG라는 은행 인수를 통해 보험회사가 오히려 금융업으로 진출하는(어슈어뱅크) 맞불 작전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 밖에 프린터 시장으로 진출, HP와 새로운 경쟁상대가 된 델컴퓨터나 중고차판매와 소매금융업으로 진출해 관련 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는 월마트 역시 모두 영역 파괴 현상의 산물로 생각할 수 있다.
기업 메모리가 발빠른 대응을 방해
문제는 이와 같은 영역 파괴 현상에 대한 기업의 대응 행동이다. 시장에 이미 진입해 있는 기성업체들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경쟁자들이란 하찮은 존재로 보이기 마련이다.
K마트는 여러 해 동안 월마트를 시골에만 있는 조그만 업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네슬레, 제너럴푸즈와 같은 업체들 역시 스타벅스가 가진 고급 커피 시장의 위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회사의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시장점유율이 급격히 하락하는 것과 같이 구체적인 수치가 드러나야 허둥지둥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무엇이 기업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실수를 만드는 것인가. 이전의 성공 경험인 기업 메모리가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 시장에서의 성공요인이 이전의 경험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시장은 이미 다른 것을 원하는 데도 사업을 이만큼 일으키게 해준 과거의 성공경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업만으로도 이 만큼 성공했다’라는 고집스런 반응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초창기 회사가 지닌 고객, 시장 지향적인 마인드를 잃어버리고 기업의 내부 관점에서만 시간과 자원이 집중된다. 고객들은 기업의 중심에서 자꾸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터널시야에서 레이더 스크린으로
기업 메모리로 인해 시야가 왜곡되면 시장의 경쟁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과거의 성공 패턴과 경쟁의 장을 설정해온 업계의 규범 등으로 인해 소위 ‘업종적 사고’가 만연하게 된다.
산업 박람회에 가면 매년 같은 회사들을 만나게 되고 비슷한 애널리스트의 통계치를 활용, 시장을 보는 눈도 비슷해 진다. 금융 시장이 등급을 매길 때도 비슷한 경쟁업체와 함께 분류된다.
그 결과 시장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터널과 같이 좁은 시야를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경쟁 상대를 동종업계에 국한시키고 마는 것이다.
<그림 2>를 보면 정제 커피 시장만을 생각해온 네슬레와 제너럴푸즈에게는 고급커피 시장의 새로운 지평을 연 스타벅스의 진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브라질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마시는 커피(4.5kg)의 생두 가격은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2~4$) 밖에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스타벅스와 같은 브랜드 커피 전문점이 지닌 부가가치의 효과를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터널 시야 대신에 필요한 것은 레이더 스크린이다. 둘 사이의 다른 점은 경쟁업체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사업이 고객 관심 사항에 부응하면서 앞서 나가기에 유리한 위치에 서 있느냐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이와같은 레이더 스크린 시야는 경쟁업체를 ‘우리와 같은 사업을 하는 기업들’이라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쟁의 시야를 고객들이 관심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사업 설계들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새로운 경쟁자들과의 싸움에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적절한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경쟁자로 인해 기업의 실적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한 경우라면 기성업체로서는 적절한 대응의 시기를 이미 놓친 셈이다.
반면, 새로운 경쟁 업체가 시장에 진입하는 것 역시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경쟁자가 critical mass를 확보하기 전에 기성업체들이 이를 탐지, 적절한 대응을 할 수만 있다면 경쟁은 가능하다. 이미 확보된 인프라를 지렛대로 활용, 오히려 경쟁자들 보다 우월한 위치를 선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새로운 경쟁자들이 영역을 침범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그들과 전면전을 벌여야 하나? 아니면 적극적인 제휴로 협력을 모색해야 하는가?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이와 같은 기업의 대응 전략을 알아보는 것이다.
영역 파괴 현상에 대응한 기업의 전략
새롭게 등장한 사업이 자사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발견되면 기업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과연 경쟁사의 사업모델이 우리의 핵심 사업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냐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도 그 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이를 통해 <그림 3>과 같이 3가지 전략 옵션을 도출해 보았다.
● 최소 대응
경쟁사의 사업 진입이 자사의 핵심 사업에 그다지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기존 사업 모델로도 충분히 대처 가능한 경우다. 기업은 사태를 관망하며 추가적인 대응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경쟁자를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향후에 위협적인 경쟁자로 부각되는 많은 기업들이 초기에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레이더에 포착되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경쟁자에게 유리한 경영환경이 전개될지 모르는 만큼, 기본적인 R&D 투자를 통해 최소한의 역량을 배양해 놓고 있어야 한다. 영리한 경쟁자가 재빠르게 시장을 잠식할 것을 대비, 최소한의 대응으로 경쟁자를 예의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파산 신고를 낸 K마트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 애초에 K마트는 사람이 많은 대도시 위주의 영업을 펼치고 있었던 반면, 월마트는 중소도시를 거점으로 한 할인점이라는 사업모델로 시장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당시 K마트는 업계의 1위 였으며, 이미 월마트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던 상황이라 월마트를 시골의 하찮은 업체라고만 생각하고 그 존재를 무시해 버린다. 그러나 월마트는 물류와 재고 관리를 포함한 몇몇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이며 오히려 K마트의 시장을 잠식하기에 이른다. K마트가 경쟁에 필요한 기술에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1위 자리를 빼앗긴 후였다.
● 제휴 모색
경쟁자의 시장 진입으로 인해 자사의 핵심사업이 크게 위협을 받고 있지만 기존 사업의 모델로 이를 적절히 대처할 수 없는 경우다. 기술의 융합과 같은 이유로 이전의 사업모델로는 전혀 대응이 불가능한 영역에서 경쟁자가 침범해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이 발달하면서 각광받게 된 전자결제 시스템을 생각해보자. 과거에는 신용카드 업체가 기존의 신용결제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대폰을 이용한 무선결제 시스템, 유선전화를 이용한 소액결제 등과 같이 수많은 결제 시스템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신용결제는 더 이상의 신용카드업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실제로 신용카드 업체의 사업 모델로는 이 모든 것을 대응하기도 어렵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제휴를 생각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최근 LG텔레콤과 LG카드가 서로 손잡고 휴대 전화번호로 카드를 결제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키로 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지금까지는 온라인에서 물품을 구매할 경우 카드번호와 같은 개인의 신용정보를 입력해야만 했지만 LG텔레콤과 LG카드의 제휴로 휴대폰 번호만 입력하면 물품구매가 완료된다.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통신업과 카드업체의 제휴로 고객들은 보다 안전하게 m커머스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두 기업은 자사의 핵심 사업을 보전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업기회를 발굴해 낸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리게된 것이다.
● 혁신적 모방
경쟁사의 시장 진입으로 자사의 핵심 사업이 크게 위협을 받게 되지만, 동시에 경쟁자가 제공하는 가치를 기존 사업의 모델로도 충분히 상쇄가 가능한 경우다. 이 때 기업은 적극적으로 경쟁자의 사업 모델을 밴치마킹해야 한다.
특히 기성업체들은 오랫동안 시장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고객들의 기호가 변할 때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기업 메모리에 얽매이지 않는 신설업체와 비 전통적 업체들은 새롭게 나타나는 고객 관심사항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기성업체들 역시 연구개발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지만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역(逆) 연구개발(D&R)의 방식에 더욱 주력할 필요가 있다. 경쟁자가 가진 사업모델을 재빨리 배워 더 나은 가치를 고객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말이다.
코닥사의 경우 2000년대에 들어 디지털카메라와 같은 디지털이미징(Digital imaging) 사업이 회사의 핵심사업을 크게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필름사업이 회사 수익의 9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디지털카메라의 급속한 시장잠식은 회사의 존폐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 때 코닥사의 대응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디지털이미징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었다. 시장에 새롭게 진입한 경쟁자를 학습의 대상으로 삼고 철저히 모방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코닥의 벤치마킹 전략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경쟁자 이상의 혁신적 가치를 제공하려는 것으로 최근에는 35밀리 필름의 2배에 달하는 반도체 칩을 개발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결과 디지털 카메라 부분에서 코닥은 세계 3위의 업체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당신의 포지션을 재점검하라
이상으로 영역 파괴 현상에 대한 기업의 대응전략을 살펴보았다. 21세기는 3T(IT,BT, NT)간의 융합으로 인해 영역 파괴 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점에서 앞으로도 영역 파괴의 문제는 기업의 생존에 커다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영역 파괴가 진행이 되면 무엇보다 자사가 가진 비즈니스 모델이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전체 글로벌 네트워크 상에서 어떤 포지션, 전략, 기술을 가지고 동참할 것인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과정에서 방향성 없이 영역 파괴를 위해 무작정 몸집을 키우는 기업들은 오히려 큰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제조업체가 유통업체로 영역을 파괴한 사례였던 런던 포그(Londog Fog)의 경우도 이와 같은 실패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런던포그는 레인코트 분야에서의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기반으로 1995년 30개 공장 직영점을 비롯해 140여개 점포를 세워 유통업체로의 영역파괴를 단행한다. 그러나 자사 제품을 취급하는 백화점과의 채널갈등 문제로 1998년 9월 런던포그는 결국 파산을 신청하고 만다.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는 것을 깨달은 런던포그는 110개 점포의 문을 닫고 1개의 공장 직영점만을 남겨둔 채 새롭게 활로를 모색 중이다. 산업간 경계가 모호해지는 시기일수록 명확한 자사의 포지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위기는 기회
그러나 민첩한 기업은 이와 같은 혼돈의 시기를 오히려 자사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설명한 코닥의 사례가 그 좋은 예다.
이미 세계 초일류 기업들은 영역파괴를 이용, 미래를 선점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중이다. 노키아는 이미 인터넷과 이동통신의 결합을 의미하는 IP(Internet Protocol) 컨버전스를 준비중이고, 일본 NTT 역시 10년 뒤에는 모든 전화를 인터넷 기반으로 교체하는 차세대 네트워크(NGN)를 구축중이다. 경쟁만을 생각하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뿐이다. 적극적인 도전정신으로 영역파괴를 새 수익원을 창출의 기회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